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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2.11 [칼럼] 이야기는 힘이 세다

'모니터를 끄자' 프로젝트와 관련한 좋은 칼럼이 있어 소개합니다. 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의 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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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2-11일자 경향신문
[사유와 성찰]이야기는 힘이 세다

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

소설가 조정래 선생이 텔레비전 대담 프로그램에서 유년의 기억을 떠올린 적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 어느 집 사랑방에 동네의 머슴들이 모여서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어린 조정래는 거기에 종종 매료되었다. 사람들이 어쩌면 저렇게 재미있게 말을 할 수 있을까. 그 언어의 마술에 하염없이 빠져들다 보면 숙제도 잊어버려, 다음날 학교에 가서 선생님에게 매를 맞은 적도 있다고 한다. 이 시대의 큰 이야기꾼은 어릴 때부터 말의 묘미에 그렇게 사로잡혔다.

머슴들이 고상한 대화나 심각한 토론을 나누었을 것 같지는 않다. 화제의 대부분은 자신이나 가족이나 이웃들의 경험, 마을에 흘러다니는 이야기였으리라. 텔레비전이 없었고 신문과 라디오도 귀했던 당시에 가장 훌륭한 미디어는 단연코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소통이 직접적인 대화로 이뤄졌기에 살아가면서 웬만큼의 입담을 체득했다. 그리고 말솜씨가 다소 서툴러도 이심전심으로 통할 수 있었다.

인간의 소통에는 정보 전달 이상의 뭔가가 있다. 언어도 단지 표현의 수단만이 아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 꽃이 되었다’는 시 구절처럼 인간의 언어에는 대상을 새롭게 빚어내는 힘이 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리얼리티에 의미를 입히고, 그렇게 형성된 상징 공간은 또 하나의 리얼리티가 된다. 그 부피가 넉넉할수록 인생은 살만한 것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화자(話者)들 사이에 공동의 경험 세계가 두터울수록 언어는 큰 울림으로 진동한다.

미디어의 혁신이 숨 가쁘게 이뤄지는 요즘,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풍부한 언어와 상징을 공유하며 살아간다. 언제 어디서든 인터넷이 접속되고, 소셜 미디어를 통해 엄청난 이야기들이 생성되고 유통된다. 쇄도하는 데이터를 훑어보는 일에 두뇌가 혹사당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런데 그 가운데 얼마만큼이 삶의 자양분으로 스며들까. 너무 많은 정보가 일회용 심심풀이로 소모된다.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자료의 집적으로 생각과 대화의 마당을 넓히기는 어렵다.

미디어를 거부하고 오프라인만 고수하자는 이분법이 아니다. 균형과 조화가 중요하다. 현란한 이미지와 선정적인 뉴스에 미혹되어 마음의 창조력이 고갈되고 있지 않는지, 발신에 대한 강박 때문에 경청의 여백이 위축되지 않는지, 이따금 점검해볼 일이다.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 앉았는데 마땅히 나눌 말이 없다면, 언어의 실타래를 풀어내고 이어가는 문화 유전자가 퇴화되고 있지 않은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무엇이 말문을 가로막는가. 자녀 동반으로 외출하는 부모들이 지하철에서 어린아이에게 휴대폰을 쥐어주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아이는 그것으로 게임을 하거나 저장되어 있는 사진들을 넘겨보느라 삼매경이다. 스마트폰은 흥미진진한 기능과 프로그램이 많아 더욱 쉽게 몰입시킨다. 덕분에 부모는 편안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하지만 가족들이 사뭇 외로워 보인다.

언어의 줄기세포는 재생될 수 있을까. 가능하다. 그러나 시간이 걸린다. 꾸준한 연습이 필요하다. 글쓰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생활의 사소한 경험들을 찬찬히 살피고, 거기에 묻어나는 마음의 움직임들을 헤아려 보자. 생각과 느낌의 미동(微動)을 알아차리는 즐거움은 쏠쏠하다. 타인과 나누고 싶은 충동이 저절로 솟구친다. 소통과 교감에서 일어나는 공명은 삶의 격조를 드높이고, 만성적 실어증을 자연스럽게 치유해준다.


스토리텔링의 시대라고 한다. 그런데 거기에는 문화산업의 경쟁력 차원보다 더욱 소중한 부가가치가 담겨 있다. 삶의 서사를 통해 우리는 존재의 이유를 만나는 것이다. 불안과 망상이 가중되는 세상에서, 당당한 내면의 항체를 배양할 수 있다. 갖은 괴로움과 굴욕으로 꼬이기 쉬운 인생, 그 가닥을 다잡으며 꿋꿋하게 밀고 나갈 수 있는 힘을 거기에서 얻는다.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든다면 견딜 만해진다.’ 극작가 딘센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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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착한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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